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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고승

동산큰스님

범어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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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불사와 종정-淨化佛事와 宗正

동산큰스님

서기 1953년 64세

불교의 中興을 논의하기 위하여 통도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와 고승회의가 개최되고, 5월에는 스님이 倭色사판승들의 행패가 날로 심해짐을 보고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檄文을 전국 衲子들에게 보내었다. 諸方의 납자들은 스님의 격문을 받아보고는 크게 호응하여 正法具顯을 위하여 殺身成仁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淨化佛事에 불을 당긴 것이다. 격문의 내용은 대략 "나라가 해방이 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아직도 왜색사판승들의 桎梏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국의 비구승들은 더욱 더 團合하고 奮發하여 1천 6백년간 지켜온 우리 불교의 청정계맥을 바로 세우고 흐트러진 僧風을 바로잡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이 일로 인해서 범어사의 事判僧들은 帶妻僧側 총무원과 함께 다시 선원을 폐기하고 조실 스님을 追放하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였다.修行衲子들은 祖室 스님의 지휘하에 一致團結하여 끝내 선원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勢 不足으로 一次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할 수 없이 스님은 납자들을 데리고 경북의 영천 은해사에 가서 새로운 회상을 만들고 수행정진에 열중하고 있었다.

동산큰스님

서기 1954년 65세

그동안 여기 저기에서 비구승과 대처승들간에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드디어 사회의 문제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비구승들의 주장이 정당함을 이해하고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에 관한 제1차 유시가 내려졌다. 즉 "대처승들은 사찰에서 물러가고, 사찰소유재산은 반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불교계는 참으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갔다. 그래서 6월 24일에는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元老比丘 스님들이 會同하여 불교정화운동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다음날에는 교단정화운동 추진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 7월 2일에는 큰스님과 曉峰 스님, 寂音 스님의 이름으로 全國比丘僧 代表者 大會를 개최할 것을 공문으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8월 24일, 25일 양일간 선학원에서 64명이 참석하여 제1차 全國比丘僧 代表者 大會를 열고 불교정화방침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9월 30일 제1차 불교정화중앙종회를 개최하고, 10월 9일에는 큰스님등 300명이 斷食에 돌입하였다.(한국불교총람) 11월 3일 제2차 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종단의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종정에 河東山, 종무원 도총섭에 李靑潭이었다.(한국불교총람) 이때가 큰스님으로서는 처음 종정이 되신 해이다. 그래서 더욱 큰스님은 대처승단을 정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로써 매진하시게 되고, 그리고 이후 두 번이나 더 宗正에 피선되었다.

서기 1955년 66세

전국비구승대회는 2차, 3차, 4차로 이어졌고 대처승들은 완강히 버티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의 諭示도 또한 2차, 3차, 4차로 계속되었다. 정화에 대한 대통령의 유시는 전후 8차나 있었다. 이와 같이 복잡한 상황과 우여곡절 속에서 스님은 堪 . 忍 . 待 즉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정신으로 그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었다. 그러면서 당대 제일의 知慧와 福德을 갖추신 善知識으로서의 霜松潔操와 水月虛襟의 자세를 견지하시어 끝내는 정화를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堪 . 忍 . 待와 霜松潔操 水月虛襟이라는 글은 스님의 인격과 그 삶의 자세가 어떠한가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스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堪 . 忍 . 待와 霜松潔操 水月虛襟이라는 글을 자주 써 주시곤 하였다. 실로 이 글을 보면 스님이 떠오르고, 스님의 사진이라도 뵈오면 이 글이 생각날 만큼 스님을 상징하는 글이 되었다. 스님을 위시한 비구승측의 수차에 걸친 승려대회와 끈질긴 노력으로 인하여 8월 1일부터 1천여 명이 대거 참석한 마지막의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렸다. 이러한 와중에서 스님은 대회 2일째인 8월 2일에 새로운 임원진에 의해 다시 宗正으로 추대되었다. 1955년 8월 4일자의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會許可없이 회의를 續行 僧侶大會 제2일엔 任員 改選' 이라는 題下에, "치안당국의 제지로 회의 계속이 불가능하리라고 예측되던 전국승려대회는 3일에도 무난히 개회되어 서울 조계사 법당에서는 상오 10시 30분부터 질서 정연한 가운데 약 8백 명의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2일에 이어서 회의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동 대회 제2일째인 이 날에는 과거 총무원측 간부와 종정에 대해서 불신임 결의를 하고 다시 개편 선출하였으며 전문 101조와 부칙으로 되어있는 종헌 개정안도 아울러 통과시켰다. 동 총무원의 간부 및 종정은 다음과 같다. 宗正 河東山, 總務院長 李靑潭, 總務部長 高景錫, 敎務部長 金相鎬, 財務部長 朴淇宗, 監察院長 鄭金烏, 監察副院長 金瑞雲 "이라고 되어 있다. 스님은 이 때 두 번째의 종정에 추대되셨던 것이다. 8월 4일의 대회에서는 스님께서 대회를 끝내시고 {六祖壇經}을 설법하였는데 3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8월 12일, 드디어 그동안 비구승측의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모든 사항을 국가에서 認定하기에 이른 것이다 최종적으로 宗團의 임원진을 선출하는 자리에 문교부장관이 임석하여 축사를 하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정화는 그 종막을 내린 것이다. 정화운동이 비구승측의 승리로 완결되자 스님은 모든 공직을 내놓고 다시 범어사로 돌아왔다. 정화불사를 끝마치고 범어사로 내려오신 9월에는 조실로서 정화불사 이후 초대범어사 주지를 겸임하시고 예전처럼 선원중심의 사찰운영과 납자제접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셨다.

서기 1956년 67세

이해 11월 15일에서 21일까지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열린 弟四次 世界佛敎徒大會에 曉峰 스님, 靑潭 스님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불교가 세계불교와 가진 최초의 교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한국불교의 정화불사를 세계만방에 인식시켰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인도의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12월 15일에 귀국하였다.

서기 1957년 68세

이 해 2월 24일 은사이신 용성 스님이 법을 전한 지 5년 만에 入寂하셨다. 世壽는 77세, 法臘은 61세였다. 일찍이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醫學을 공부하던 스님에게 진리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다. 독립운동으로 3년간의 獄苦를 치를 때 그 옥바라지를 하였고 豁然大悟의 기쁨을 함께하며 法을 전하고 寶印을 신표로 물려주셨던 은사 스님이시다. 스님은 이제 龍城門徒의 首長으로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고 명실공히 어른으로 사셔야 하는 큰 任務를 책임지게 되었다.

서기 1958년 69세

8월 10일 대한불교조계종 제13회 증앙종회가 개최되고, 8월 13일 큰스님은 종정에 또다시 추대되었다. 비록 앞서의 두 번은 정화의 와중에서 오래 하지는 못했으나 이번이 종정에 추대된 것이 세 번째이다. 10월 6일, 가을이 깊어 가는 계절, 스님은 종정으로 계시면서 대한불교 중앙총림 금강계단에서 서울의 수많은 사부대중들에게 菩薩大戒와 具足戒를 傳授하였다. 이 때에 큰 성황을 이뤄서 특히 많은 스님들이 보살계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지게 되어 그 후 지방의 다른 사찰에서도 보살계를 설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그때의 戒牒에 의하면 傳戒大和尙에 큰스님을 비롯하여 갈마에 昔岩 스님, 敎授에 古庵 스님, 七證師에 曉峰 스님, 幻峰 스님, 錦招 스님, 麟谷 스님, 靑潭 스님, 漢松 스님, 慶山 스님 등이었다. 11월 24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개최된 제5차 세계불교도대회에 李靑潭, 徐京保 스님과 함께 참석하였다. 그때 세계불교도들에게 宗風을 높이 드날려 각국 불교인들에게 한국불교의 인식을 새롭게 심어주고 돌아왔다.

서기 1959년 70세

범어사의 조실로 주석하시면서 한편 종정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계시던 때이다. 이 해 3월 19일에는 通度寺의 末寺인 染山 內院寺 法堂落成式에 참석하시어 설법을 하였는데 그때의 법문 한 구절이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深深密密 無壅塞 그 도리는 깊고 깊으며 세밀하고 세밀하되 조금도 옹색함이 없다."

그동안의 전국사찰의 관리체계는 각도에 종무원을 두고 그 종무원에서 그 도의 사찰들을 관장하였다. 그러다가 이 해 9월 12일, 대한불교조계종 宗正 河東山 스님의 이름으로 종령 제3호를 내려 전국에 24개 首寺刹制度로 전환하였다. 나머지 다른 중소사찰들은 모두 24개 수사찰에 알맞게 배정하여 수사찰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내려온다.

서기 1960년 71세

1월 1일은 스님이 종정으로 계실 때 대한불교사를 설립하여 종단의 機關紙인 {大韓佛敎}라는 신문이 월간으로 창간되었다. 4월 24일에는 서울의 조계사에서 보살계 수계식이 있었다. 정화불사의 성공을 축하하여 수많은 사부대중들이 동참하여 큰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이 해에는 4 . 19혁명으로 많은 학생들이 사망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下野성명을 발표하고 나서 하와이로 망명하는 등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다. 이런 와중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정화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스님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은 종정으로 재임하고 있었으나 또한 범어사의 조실이었다. 그래서 자주 범어사에 내려왔으며, 강진의 백련사에도 며칠씩 다녀오셨다. 이 해에 스님은 나라와 불교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는 揮毫를 남겼다. 물론 평소에 스님께서 후학들에게 자주 써 주시던 글이다.

瑞草生嘉運(서초생가운) 상서로운 풀은 좋은 운수를 만들고
林花結早春(임화결조춘) 숲 속의 꽃은 이른 봄을 가져온다.

서기 1961년 72세

나라가 더욱 시끄러워지리라는 것을 알고 지난 해와 같이 종정과 범어사의 조실을 겸하시면서도 5 . 16이 있던 그 해 강진의 백련사에 가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5월 22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佛敎辭典}이 간행되었다. 스님은 {불교사전}에 '千古榜樣'이라고 揮毫하였다.

서기 1962년 73세

1월 20일 문교부장관의 종용에 따라 통일종단의 설립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종정 하동산 스님과 당시 대처승측 종정 국묵담 스님이 그 대표가 되었다. 이어서 2월 12일에 비구, 대처 양측이 8년 만에 회동하여 불교재건 비상종회가 개최되고, 4월 1일에는 비구, 대처의 통합종단이 구성되었다. 통합종단이 구성되자 스님은 종정의 소임을 사임하시고 범어사로 내려와서 寺宇를 일신하고 납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