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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고승

동산큰스님

범어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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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시절 - 在家時節

동산큰스님

서기 1890년 2월25일

스님께서는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 244번지에서 탄생하셨다. 父는 河聖昌 이시고 母는 鄭敬雲이다. 本貫은 晋州며, 본명는 東奎였다. 스님께서 뒷날 이 땅의 외색불교를 척결하는 불교정화운동에 혼신의 힘을 쏟을 곳을 예정한 듯 이 해는 일본의 日蓮宗이 1877년 부산, 1880년 원산, 1884년 인천에 別院을 세워 항구도시를 다 장악한 후 드디어 1890년 경성에까지 별원을 세워 이 땅의 중앙을 일본불교가 점거한 해에 태어났다.

서기 1896년 7세

스님은 단양읍에 있는 당시의 지방 교육기관인 鄕塾(書堂)에 들어가서 한학을 배웠는데 하루하루 배운 것을 매양 背誦 하는지라 사람들이 신동이 출세하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학공부를 7세에 시작하여 四書三經과 기타의 史書들을 7년 동안에 걸쳐 모두 履修하였다.

서기 1904년 15세

鄕里의 단양읍에도 개화의 물결로 인하여 당시로서는 새로운 교육기관인 益明普通學校가 들어왔다. 그래서 스님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익명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신학문을 공부하려면 국가에서 제정한 단발령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대대로 儒敎의 전통에 의하여 머리를 길러 상투를 올렸던 것을 하루아침에 자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많은 충청도의 양반고장에서는 더욱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시대의 변화 추세를 감지하고 신학문은 꼭 배워야 한다는 결심 아래 완고하신 부모님을 설득하여 머리를 깎고 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때 익명보통학교에서는 스님의 담임선생님은 한글학자로 큰 업적을 남기신 周詩經 선생이었다. 신구학문에 두루 밝으신 큰 스승 밑에서 스님의 공부는 日就月將으로 성숙해 갔다. 옛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한문을 眞書라고 하고 우리글인 한글을 諺文, 즉 상말, 속된 글이라 하여 賤視하여 왔는데 그 때 주시경 선생께서는 "한문은 중국의 글이고 한글은 순수한 우리의 글이기 때문에 결코 卑下하거나 천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그 이름을 訓民正音이라고 하던 것을 역사상 최초로 '한글'이라고 불러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려야 한다고 늘 주창하였던 것이다.

서기 1908년 19세

주시경 선생과 같은 훌륭한 先覺者 밑에서 신학문의 기틀을 마련하고 익명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이후 역시 주시경 선생의 권유로 경성의 유학길에 올라 中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스님의 경성 유학생활에는 친고모부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신 葦滄 吳世昌 선생의 도움이 컸다고 평소에 말씀하신 바 있다.

서기 1910년 21세

이 해 8월 29일은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인 韓日合邦條約이 공포되던 날이다. 이곳 저곳에서 김석진, 황현 같은 뜻있는 義士들이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국민 전체가 나라 잃은 비탄에 빠져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스님은 생각하기를 나라를 다시 찾고 국가와 민족을 일으켜 세우는 길은 개개인이 나아가서 학문을 닦고 실력을 키우는 길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 판단은 곧 주시경 선생의 뜻과 일치하게되어 진학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경성의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보다 전문적인 학문의 연마를 위하여 경성 總督府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많은 학문의 분야 중에서 의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병마의 고통을 건져주기 위한 선천적인 따뜻한 자비심의 발로였다. 경성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동안 스님은 姑叔인 葦滄 선생의 권유로 龍城 禪師를 자주 친견하게 된다. 스승이신 용성 큰스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葦滄 선생의 안내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葦滄 선생과 龍城 스님은 甲子生(1864년) 同甲이며 龍城 스님이 대각교당에 괴석한 이래 자주 만나서 국사를 걱정하며 同志의 정을 두터이 해온 사이였다. 스님께서 처음 용성 큰스님을 뵈었을 적에 의학을 공부한다는 청년에게 큰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인간의 身病은 의술로 어느 정도 치료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리겠소?" 이 말씀에 충격과 감동을 받은 스님은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욱 용성 큰스님의 高邁하신 인격에 마음이 이끌리게 된다. 불교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종교라는 말도 들었고, 마음은 만법의 근원이며 우주의 근본이라는 말씀도 들었다. 그로부터 스님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불교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학교를 마친 뒤에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佛敎의 길로 나아가리라는 決心을 굳히게 된다.

서기 1911년 22세

스님은 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한편 1907년 11월 29일에 島山 안창호 선생 등이 조직한 京城府 興士團內 國語硏究會에서 우리의 국어와 民族思想에 대한 공부도 병행하였다. 공부와 아울러 그 당시 흥사단에 출입하는 숱한 志士와 義士들을 많이 만나면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일제에 抗拒하는 光復運動精神을 크게 함양하게 되었다. 이 해에 앞으로 스승이 되실 용성 큰스님께서는 서울 봉익동 1번지에 大覺寺를 창건하였다. 역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만약의 경우 일제가 민족불교를 抹殺하고 자기네들의 불교를 이 땅에 심고자 劃策할 때를 대비하신 것이다. 이 해의 6월 3일에 일본의 법률로 전문 7개 조로 된 사찰령이 반포되어 모든 사찰과 승려들은 구조적으로 식민통치의 예속을 받게 되었다. 한 가지 예로서 본래는 山中公議에 의하여 住持가 선출되었으나 전통과 자율성을 무시하고 施行規則 제2조에서 "本山의 주지는 조선총독에게, 31본산 이외의 사찰주지는 지방장관에게 신청하여 認可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용성 스님의 大覺寺 건립은 위와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리의 固有한 傳統佛敎를 지켜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