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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고승

동산큰스님

범어사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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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와 보임- 悟道와 保任

동산큰스님

서기 1927년 38세

이 해 정월 보름 드디어 김천 직지사에서 三年結社를 마치고 4월에 금정산 범어사 선원으로 가서 여름안거에 들어갔다. 스님은 범어사에서 사실 때가 마침 여름이라 嗜好飮食으로 상추쌈과 부릿대적을 특히 좋아하신 것으로 소문이 났다. 물론 평소에도 좋아하였으나 이 때부터 대중들의 눈에 크게 띈 것이다. 부릿대적이 있는 날이면 임시 放禪을 명하셨고, 정기 식사까지 폐하시고 즐겨하셨다. 상추쌈을 즐겨드신데에는 탁자 밑의 어린 수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뒷날까지 상추만 보면 대중들은 항상 스님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은 상추쌈이 있는 날에는 그 쌈을 빨리 드시고 싶은 마음에서 공양 죽비를 치기도 전에 이미 쌈을 싸서 들고는 죽비 치기만을 기다리신다. 공양을 돌리는 사미들의 동작이 늦은 것이 못마땅하여 매우 답답해 하셨다. 대중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 즐겁기도 하여 매양 보고싶어 했다. 간혹 짓궂은 수좌들은 스님의 그런 관례를 이용하는 일도 있었다. 스님의 기호식품으로는 그 외에도 국수와 정월달의 생미역을 들 수 있다. 생미역이 들어오는 날에는 자주 후원을 드나드시면서 미역을 씻고 손질하는 일을 감독하셨다. 모르는 사람이 만약 미역에 칼을 대는 날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일일이 손으로 다듬고 손으로 잘라야 맛이 있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스님의 嗜好飮食에 관한 이야기들은 범어사에서의 시절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後代에까지 오래 오래 전해지는 사실들이다. 이 해에는 범어사 金魚禪院에서 정진하고 계실 때였다. 스님은 선원 동쪽에 있는 대나무 숲을 평소에도 유난히 좋아하시어 放禪時間이면 자주 그곳을 거닐었다. 7월 5일, 그날도 방선시간에 대나무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 소리를 들었다. 늘 듣는 소리건만 그날의 그 댓잎소리는 유난히 달랐다. 실은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르게 들렸던 것이다. 스님은 그 순간 활연히 마음이 열렸다. 그간의 가슴속의 어둠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수천근의 무게로 짓누르던 의심의 무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스님은 그 순간을 "西來密旨가 眼前에 明明하였다." 라고 하셨다. 다음의 글은 그 때의 그 消息을 표현하신 내용이다.

畵來畵去幾多年(화래화거기다년) 그리고 그린 것이 그 몇 해던가
筆頭落處活猫兒(필두낙처활묘아)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 있는 고양이로다.
盡日窓前滿面睡(진일창전만면수) 하루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夜來依舊捉老鼠(야래의구착노서)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의사의 꿈을 버리고 진리를 窮究하여 出世間의 장부로서 만중생들을 苦海로부터 건지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헤매인 지 어언 15년이 지나고서 이제사 그 쉴 곳을 찾은 것이다. 곧바로 용성 스님을 찾아가서 이 벅찬 사실을 말씀드렸다. 용성 스님은 흔연히 認可해 주시고 자신의 法脈이 師資相承됨을 크게 기뻐하시었다. 범어사 동쪽 대나무 숲에서의 悟道의 인연이 있은 후 스님은 그 대밭을 특별히 아끼시고 직접 돌봤다. 竹筍이 나는 계절에는 혹시 사람들의 손이라도 타지 않을까 하여 자주 들렀다. 스님은 別號를 스스로 筍窓이라고까지 지어서 쓰셨다. 오늘도 그 때의 그 자리에는 큰스님의 化身인양 사리탑과 碑石이 묵묵히 지키고 서있다. 참으로 큰스님과 대나무 숲은 宿世의 至重한 인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서기 1929년 40세

스님께서는 2년 전 댓잎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保任을 위한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아니하였다. 保任이란 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자신의 깨달은 바를 잘 보호하고 깊이 간직한다는 뜻이다. 범어사에 전해지고 있는 芳啣錄에 의하면 40세가 되던 이 해의 冬安居에 스님께서 처음으로 祖室이 되어 參禪衲子들을 提接하였다.

서기 1930년 41세

3월 15일 범어사 金剛戒壇에서 첫 菩薩戒를 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아직 용성 스님으로부터 傳戒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아마 교수 화상으로 계를 설하였다. 이 해의 범어사 夏安居에도 역시 스님이 조실로서 납자들을 지도하였다고 芳啣錄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