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전사자 유골 봉안

범어사, 순국전몰장병 영현 안치소

스님 참석한 추도식 수차례 열려

독경 축원 분향 등 불교의식 엄수


조국과 민족을 향한 뜨거운 마음 붉은 피로 산화하신 죽어서도 살아서도 함께 할 이름들이여 …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 누구도 범치 못할 겨레의 기상 되어 민족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니 이제 안식의 나래 펴소서….” 국립서울현충원 사진전시관 내부에 걸려 있는 글이다. 1954년 3월1일 국군묘지로 출발한 국립현충원은 6·25전쟁 당시 부산 범어사에 설치된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에서 비롯됐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국립현충원과 범어사의 인연을 소개한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4월6일 부산 범어사에서 열린 ‘경남 출신 전몰장병 제1회 합동추도식’ 사진. 국립현충원 사진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범어사에 임시 봉안되었다.” 국립서울현충원 사진전시관 2층 입구에는 ‘국립묘지의 설립배경’이란 제목으로 이같은 설명이 적혀 있는 사진이 있다. ‘범어사에서 거행된 전몰장병 추도식’이란 제목의 빛바랜 흑백사진이다. 범어사 대웅전 앞마당에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전몰장병 추도식 모습이 생생하다.

대웅전 앞에 마련된 영단 윗부분 가운데에는 ‘봉안○(奉安○)’이란 글자가 적혀 있다. 마지막 글자는 희미하여 판독이 어렵다. 영단 주위에는 각계에서 보내온 조화(弔花)가 줄지어 있고, 대웅전 오른쪽 처마 밑에 세로로 걸린 현수막은 ‘護國(호국)의 神(신)’이라는 글씨가 확인 가능하다. 관음전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마당에는 가사를 수한 100여 명의 스님도 보인다. 흰색 소복을 입은 전몰장병의 유가족들과 군인, 시민이 행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전사자를 추도하는 영가등도 사진에 나타난다.


이와 함께 대웅전 마당 한켠(지금의 종각 앞)에는 가로 565.2㎝, 세로 1064.4㎝의 범어사 괘불(掛佛)이 걸려 있다. 대한제국 광무9년(1905년)에 만든 괘불은 가운데에 아미타불 입상이 모셔져 있고, 왼쪽에는 관음보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시립(侍立)하고 있다. 뒤편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묘사되어 있다. 아미타불은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부처님이다. 이날 추도식에서는 전몰장병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소장한 이 사진은 1952년 4월6일 엄수된 ‘경남출신 전몰장병 제1회 합동추도식’으로 추정된다. 그해 4월8일자 경향신문에는 ‘영령이여! 고이 잠드시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추도식은 정오(12시) 인경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시작됐다. 군악대 연주에 맞춰 국기게양과 애국가 봉창에 이어 조포(弔砲), 묵념, 독경(讀經) 순으로 진행됐다. 범어사 조실 동산스님을 비롯한 스님 전체가 전몰장병 축원문(祝願文)을 봉독했다. <경향신문>은 “젊은 미망인의 품에 안겨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와 대면하려고 식장에 들어오는 철모르는 유아(遺兒)들의 모습은 미망인과 식에 참석한 관민(官民)들을 한층 더욱 울려주는 것이었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스님들의 축원문 봉독에 이어 제주(祭主)인 경남지구 병사구사령관 김준원 중령이 제문(祭文)을 낭독했다. 김준원 사령관은 “조국 대한의 남아로 태어나 아무런 보수도 영화도 사후의 특명도 없이 조국의 이름 아래 그 젊고 꽃같이 아름다운 청춘은 저 바다에서 높은 창공에서 산야에서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호모(毫毛)와 같이 던진 숭고한 충성을 찬양하나이다”라고 애도했다. 이어 김 사령관은 “영령이어 안식(安息)하소서. 조국의 수호신이 되신 전우여 부디 고이 고이 잠드옵소서”라고 추도했다.


이날 추도식은 군관민 추도문 봉독, 양성봉 경남도지사 추도사, 유가족 내빈 소향(燒香, 분향), 이화여대 합창단 만가(輓歌) 합창 등을 거쳐 오후2시에 종료됐다.

  
 호국영령이 잠든 국립서울현충원.

추도식에 앞서 양성봉 경남도지사와 김준원 사령관은 시민들의 동참을 당부하는 안내문을 언론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다. 양 지사와 김 사령관은 “(순국장병) 그들은 우리의 귀여운 아들이며 아까운 형제들”이라며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야 할 것”이라고 추도식 동참을 호소했다.


범어사에 안치했던 전몰장병의 영현 일부는 1953년 7월초 서울로 옮겨진다. 1953년 7월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2일 태고사(太古寺)에 봉안, 서울 출신 호국영령 27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태고사는 지금의 조계사이다. <경향신문>은 “멸공전선에서 조국의 호국신으로 산화하여 그동안 부산 범어사에 안치되어 있던 서울 출신 27위(位)의 영령은 2일 새벽 태고사에 봉안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무언의 개선용사를 봉영하는 영등포역에는 흐느껴 우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김일환 국방차관, 김 서울시장,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 엄주명 대령 이하 군관민 다수가 참석했다”고 전했다. 또한 “정각 7시 태고사에 안착하여 계단 위에 안치된 다음 곧 이어 시경악대의 조악(弔樂)리에 엄숙한 봉안식이 거행됨으로서 무언의 개선용사들은 안치되었다”고 보도했다. 범어사와 조계사 등 한국전쟁 당시 다수의 사찰이 전몰장병의 영현을 안치하는 공간으로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한국전쟁 당시 비교적 안전한 지역인 부산에 자리한 범어사는 전몰장병의 영현을 봉안하고, 각종 추도식이 열리는 등 국립현충원의 전신(前身)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현충원 역사’ 항목에도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 봉안하여, 육군 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3년 8월2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3차 3군 추도식’이란 제목의 기사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삼군(三軍) 전몰장병의 합동 추도식이 범어사에서 두 차례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서는 “6·25사변후 3군 전몰장병의 합동추도식은 2차에 걸쳐 동래 금정산하(金井山下)의 범어사 및 동래중학교에서 거행되었던바 제3차 합동추도식은 환도(還都)와 더불어 서울에서 개최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합동추도식 외의 다른 형태의 크고 작은 추도식이 범어사에서 엄수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교계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전몰장병의 영현 안치와 추도식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나오고 있다.

  
부산 범어사에 안치되어 있던 서울 출신 전몰장병 27위가 태고사(현 조계사)로 옮겨지고 있다. 1953년 7월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사진.

한편 1951년 7월28일 김일환 국방차관과 홍범희 내무차관이 출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에서 범어사에 봉안된 호국영현의 이동 가능성을 묻는 질의가 나왔다. 당시 윤영선 의원이 “범어사에 적치(積置)한 유골들을 안치(安置)할 수는 없는가”라고 질문했다. 즉 1951년 7월 현재 범어사에 봉안된 전사자 영현의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시 국방차관이 어떠한 답변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경선스님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의 넋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역할을 한국전쟁 당시 범어사가 수행한 것은 의미가 크다”면서 “나라사랑의 전통을 지닌 범어사는 앞으로도 호국영령을 천도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를 기원하는 도량의 역할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군종특별교구장 정우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조계사와 범어사 등 여러 사찰들이 호국영령을 안치하는 숭고한 소임을 묵묵히 이행했다”면서 “특히 해방 후 국립현충원의 사실상 효시(嚆矢)에 해당하는 범어사의 영현 안치와 추도식은 역사적으로 크게 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신문3211호/2016년6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