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法性本來常寂 법성본래상적
蕩蕩無有邊畔 탕탕무유변반
安心取捨之間 안심취사지간
被他二境廻換 피타이경회환
법성은 본래 항상 고요하여
활짝 트여 끝이 없다.
마음을 써서 취하거나 버리는 사이에
두 경계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법성은 본래부터 맑고 고요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텅 빈 하늘과 같습니다. 허공은 비어서 변함이 없으니 애써 마음을 써서 취하고 버리고 옳으니 그르니 하면 두 경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과거로부터 인생을 살아오면서 선과 악, 좋은 것, 나쁜 것, 두 가지 견해 속에 살게 되면서 마음의 크고 작은 갈등 속에 인생을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근본 마음 바탕은 취사심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고요하고 차별 없는 마음이 자신의 본래 마음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두 가지 견해에 마음을 빼앗기고 온갖 갈등 속에서 힘들게 인생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자신의 참 마음은 미움도 원망도 시기도 욕심도 없습니다. 참 마음속에서 일으킨 갈등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차별하는 마음을 넘어서 다툼이 없는 파란 하늘 같은 분입니다. 옳으니 그르니 분별하는 마음은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업의 그림자입니다.
생각을 잘 살펴보면 고요한 마음 가운데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과 같습니다. 생각은 마치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와 같습니다. 바닷물은 멈춤 없이 출렁거립니다. 잠시 고요한 것 같아도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一波自動 萬波水 일파자동 만파수
한 파도가 일어나면 만 가지 파도가 동시에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고요한 마음에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오면 마음이 갖가지 생각이 일어나면서 마음에 차별심과 갈등이 일어나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항상 지켜보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보고 이끌려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깨달으신 부처님은 온갖 경계와 파도 속에서도 자유스러운 분입니다. 생각이 자신이 그린 그림자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생각의 그림자에 속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항상 편안하시므로 마음의 행복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당송시대 8대 문장가로 소문난 소동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소동파가 옥천사 승호 선사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선사를 찾아가서 “스님,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소동파가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승호 선사도 인사하며 물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아하니 인품이 훌륭하시고 학식이 높으신 분 같은데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소동파는 거만한 투로 말했습니다.
“나의 성은 ‘칭가(秤哥, 저울)’라고 합니다.”
“칭가라니! 그런 성이 있습니까?” 하고 성호 선사가 묻자,
“천하의 선지식을 달아보는 저울이라는 뜻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아 참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말한 승호 선사는 곧이어
“억!”하고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됩니까?”
소동파는 이 물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소동파는 그 이후로 불법에 귀의하고 스님들을 존경하며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음을 깨달아 온갖 시비 경계에도 당당하신 스님들의 모습 속에서 참다운 진여 자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에서 기도하고 참선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자신의 수행에 몰두해 나가야 합니다.
공부에 어려움이 있으면 스님들께 묻고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깨달음을 얻어서 성불하겠다는 원력으로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眞性本無性 진성본무법
眞法本無法 진법본무법
了知無法性 료지무법성
何處無通達 하처무통달
참다운 성품에는 성품일 것도 없으며
참다운 법에는 본래 법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법성이 없음을 요달해 알면
어느 곳에 통달치 못하겠는가.
참다운 성품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도 본래 법이라고 할 그것도 없습니다.
법의 성품을 요달해 알고 보면 인생살이에 통달하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깨달은 도인은 세상사에 걸림이 없는 한가로운 분입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불기 2569년 음력 4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