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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 - 법보신문

범어사 | 2026-03-11 | 조회수 : 16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

 
   

‘감인대’ 나침반 삼아 정진 …“‘마음 치유’의 금정산 조성할 터”

어머니 죽음에 ‘삶’ 의문
동원 스님 만나 ‘불연’

‘불교성전’ 부처님 일대기
큰 감동…출가 원력 세워

은사 벽파 스님 강조
“참고, 기다려라” 실천

행자 시절, 거동 불편한
노스님 보살피며 ‘하심’

명상?사찰음식·템플스테이
수행과 체험 하나로 묶은
‘비오마인드’ 성공 예감

절에서의 단순 체험 넘어
마음 가벼워졌나 묻는 시대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스승
‘큰일’도 지나면 웃을 일”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은 “봄·여름·가을만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겨울이 있어야 매화 향이 깊어진다”며 “시련을 견딘 사람에게서 나오는 향기는 따로 있다”고 전했다.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은 “봄·여름·가을만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겨울이 있어야 매화 향이 깊어진다”며 “시련을 견딘 사람에게서 나오는 향기는 따로 있다”고 전했다.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의 고향은 해인중학교 뒤편 작은 마을이다.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그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밤마다 호롱불을 들고 해인사 말사 청량사로 향하곤 했다. 겨울에도 시린 법당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새벽예불을 마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가 어린 눈에는 고단해 보였지만, 그 길은 어머니의 일상이었다.
정오 스님에게 해인사는 가까우면서도 낯선 곳으로 남아 있었다.

“홍류동 계곡으로 소풍을 가면 해인사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합장 한 번 안 했어요. 친구들하고 김밥이나 먹고 내려왔지요. 탁발 나온 스님을 보면 어머니는 보리쌀을 챙겨 드렸는데, 저는 속으로 ‘왜 저렇게 동냥을 받으실까’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크게 울지 않았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 입대를 앞두고 어머니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는 달랐다. 위암 말기 진단이 나왔다. 입대 날 “휴가 나오면 바로 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지만,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4주 훈련을 마친 뒤 형제들이 면회를 왔다. “어머니 잘 계시냐”고 묻자 “걱정 말라”는 짧은 말만 돌아왔다. 형제들의 표정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했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군 생활 내내 한 가지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군에서 첫 휴가를 받아 합천 부모 산소에 막걸리 한 잔을 올리고 내려오던 날이었다. 그 자리에서 형제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막내를 부탁한다는 말, 공부할 수 있게 힘을 모아 달라는 당부였다. 암으로 몸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자식 걱정을 놓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윽고 형이 있는 부산으로 향하는 완행버스에 올랐다. 텅 빈 버스 뒤편에 노스님 한 분이 홀로 앉아 있었다. 평소 스님과는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유독 그 옆자리에 앉고 싶었다.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자리를 허락받은 뒤 물었다.
“스님,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두 번째 휴가 때, 그 노스님이 머무는 해인사 아래 삼정마을 토굴을 다시 찾았다.
노스님은 자신을 동원 스님이라 했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으며 단식 행진하여 ‘인간 승리’로 불리기도 했다. 그 유명세를 피해 가야산 기슭으로 내려왔다가 고암 스님을 만나 삭발염의 했다고 한다. 이후 동원 스님은 낮에는 밭에 나가 똥장군을 지고 거름을 나르고, 저녁이면 일본에서 들여온 경전을 펼쳤다.

“제가 평소 알던 ‘스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쌀 동냥을 하며 목탁을 치고 기도만 하는 줄 알았는데, 동원 스님은 밭일과 공부, 수행을 한 삶 안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동원 스님은 밭일을 하다가 일손을 멈추곤 했다. 밭은 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끝낼 수도 있었지만, 스님은 늘 조금씩 남겨 두었다.

“제가 여쭈었습니다. ‘스님, 조금만 더 하면 오늘 다 끝내고 내일 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 남겨 두십니까.’ 스님이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오늘 다 하면 내일 할 게 없다.’ 그 말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것은 ‘서두름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모두 좋은 날이었을 것입니다.”

동원 스님은 부처님 일대기도 자주 들려주었다. 왕자가 부귀를 내려놓고 길을 나섰다는 이야기는 큰 울림을 주었다. 수행이 현실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때부터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동원 스님은 동국대에서 출간한 ‘불교성전’을 읽어보라 권했다. 부산 영광도서에서 사서 부대로 가져갔다. 동료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에 침상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휴가를 나올 때면 늘 동원 스님을 찾아 머무르며 함께 지냈다. 

1989년 동안거 행자시절. 해인사 백련암.

“제대 무렵, 출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출가 사찰을 정하는 데에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평생 해인사를 다녔으니, 출가만큼은 다른 절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범어사를 택했습니다. 창원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부산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동원 스님에게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은사를 정할 때 나에게 오면 추천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범어사로 출가한 뒤 행자 반장을 맡았다. 사중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스님들이 계셨다. 누군가는 그 곁을 지켜야 했다. 밥과 반찬을 따로 챙겨 드리고, 겨울이면 계곡에 나가 노스님들이 입었던 옷을 빨았다. 영하의 날씨에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감각이 사라지는 듯했다.

“처음에는 ‘내가 이 일을 하려고 출가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옷을 받아 드실 때마다 늘 그러셨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그 한마디에 제 마음이 풀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아, 이것이 공부구나.”

1999년 부처님오신날 금강암법당에서 은사 벽파 스님과 함께. 
1999년 부처님오신날 금강암법당에서 은사 벽파 스님과 함께. 

사미계를 받을 무렵 삼정마을을 다시 찾았다. 동원 스님은 그 자리에서 지금의 은사인 벽파 스님을 추천했다. 
벽파 스님과의 첫 친견은 강렬하게 남아 있다.
“나는 상좌를 받지 않네. 내 하나 이끌기도 벅찬데, 누구를 지도하겠나.”
침묵이 흘렀다. 정오 스님은 무릎을 꿇었다.
“제가 부족하지만, 이끌어 주신다면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또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내가 길은 열어 주겠네.”

정오 스님은 은사 벽파 스님을 11년 동안 시봉 했는데, 상좌를 부를 때면 언제나 ‘정오 수좌’라고 했다. 수행자로서의 길을 올곧게 걷기를 바라는 은사의 뜻이 담긴 호칭이었을 것이다. 
“시봉하는 내내 은사 스님께서는 ‘잘한다, 잘못한다’ 등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언젠가 그 연유를 여쭈어보니 ‘누구든 처음부터 잘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잘한다’고 말씀하셨지요. 범어사의 가풍인 견디고, 참고, 기다린다는 ‘감인대(堪忍待)’를 후학들에게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저에게도 참을 인(忍) 자에 마음 심(心) 자를 새기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 삶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금정산 국립공원 지정은 범어사에 새로운 물음을 던졌다. 명산을 찾는 탐방객들의 발길이 더 몰려들면서, 산사 특유의 고요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가 숙제로 부각됐다. 정오 스님은 이를 “혜택이면서 숙제”라고 말한다. 산을 지키는 일과 마음을 지키는 일이 따로 있지 않다는 뜻이다. 범어사는 금정산을 단순 관광의 장소가 아닌 머물며 돌아보는 치유의 자리로 삼기로 했다. 그 속에서 ‘비오마인드(Beomeosa Experience of Mindfulness)’가 나왔다.

“비오마인드는 자비(悲)와 깨달음(悟)의 관점에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불교적 삶의 방식을 현대 웰니스로 확장한 개념으로,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사찰음식·템플스테이·순례·명상·공예·차담을 조화롭게 엮어, 사찰에서 체험한 뒤 삶이 달라지는 변화를 묻는 구조다.
“이제 절에 다녀왔다기보다,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졌는지를 묻는 시대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만 달라져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정오 스님이 말한 “범어사가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결실”이다. 

그 첫 축은 사찰음식이다. 범어사는 국제사찰음식체험관을 통해 전통 사찰음식을 체계적으로 전승하고, 금정산 국립공원과 템플스테이를 잇는 수행 프로그램으로 넓히려 한다.
“사찰음식은 단순한 채식이 아닙니다. 수행자의 삶이 담긴 음식입니다. 한 끼가 몸을 가볍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마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식재료 선정에서부터 조리와 공양 태도까지 하나의 수행으로 삼으려는 시도다. 
두 번째 축은 걷기다. 금정산 능선과 산내 암자를 잇는 길을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탐방객이 늘면서 수행과 탐방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암자와 큰 절을 잇는 길에 따라 수행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그 길을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마음의 속도도 달라집니다.”
정오 스님은 걷기 명상을 ‘속도를 늦추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걸음과 호흡을 맞추다 보면 풍경보다 먼저 자기 마음이 보입니다.”

2021년 동안거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원 정진대중과 함께(입승소임)
2021년 동안거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원 정진대중과 함께(입승소임)

정오 스님은 금정산이 ‘등산 코스’를 넘어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산’이 되기를 바란다.
비오마인드의 중심은 선명상이다. 명상·차담·소리명상·호흡 수행 등 내면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이다. 제방 선원에서의 14안거를 성만, 조계사·불광사 포교 경험과 정진 시간은 범어사 선명상 체계의 바탕이 됐다.

“선은 우리 삶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합니다.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자기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방장 스님을 비롯한 사중의 어른 스님들과 함께 범어사의 선명상 체계를 어떻게 펼칠지 꾸준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최근 베트남 땀쭉 사원과 협약을 맺고 K-불교 홍보관을 열었다. 한국 선명상을 나누는 자리다.
“수행은 혼자 쌓는 것이지만, 서로 나눌 때 더 깊어집니다.”
체류형 수행도 핵심 축이다. 국제템플스테이관은 단순한 숙소가 아닌, 머무르며 자신을 성찰하는 공간으로 구상되고 있다.

“잠자리 이상의 곳이 되어, 머무는 동안 마음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길 바랍니다.”
현재 정오 스님이 계획하고 있는 국제선명상센터까지 건립되면 금정산은 자연·수행·치유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풍요 속에서도 마음이 쉬지 못하는 시대에, 범어사가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쉼 터가 되길 바랍니다.”
불자들에게 당부할 일언을 청하니 정오 스님은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를 전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희노애락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큰일 같던 것도 지나고 보면 웃어넘길 수 있는 일입니다. 봄·여름·가을만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겨울이 있어야 매화 향이 깊어집니다. 시련을 견딘 사람에게서 나오는 향기는 따로 있습니다.”

버스에서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라고 묻던 청년은 이제 산 아래 도량에 서 있다. 길을 묻던 마음은 어느새 길이 되어 있었다. 금정총림 범어사에 지금 청량한 새바람이 일고 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816호 / 2026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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