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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동산대종사 열반 50주기 특별기획 2. 정화불사〈上〉

운영자 | 2015-04-24 | 조회수 : 8318
기획연재
“사부중(四部衆)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본연대도(本然大道)에 나서라”
금정총림 범어사ㆍ불교신문사 공동
동산대종사 열반 50주기 특별기획 2. 정화불사〈上〉
  
범어사의 동산스님.


“오늘날 정화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과거의 과오를 청산하고 더욱 대중불교를 천하에 시현(施現)하자는 불타(佛陀)의 정신이므로 우리가 실행할 정로(正路)가 아닌가?”

1956년 5월19일 전국신도회에 전한 동산스님의 당부이다. 청정한 한국불교 승단을 재건하기 위한 정화불사를 시작했지만 거센 반발과 언론의 비판으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음을 통탄한 동산스님의 사자후(獅子吼)였다.

내외전을 연찬하고 계율을 호지하며 간화선 참구를 통한 수행과 전법(傳法)의 일생을 보낸 동산스님은 한국불교 재건이란 과제를 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54년 8월25일(음력) 정화불사의 깃발을 올린 제1차 전국비구승대표자 대회에 직접 참석한 이래 정화불사가 완수될 때까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중을 이끌었다. 동산스님에게 정화불사는 쓰러진 한국불교의 정법(正法) 당간(幢竿)을 바로 세우는 대작 불사였고, 부처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막중한 소임이었다.

하지만 정화불사를 완수하는 일은 험난하기만 했다. 대처승들의 끊임없는 반대와 훼방, 그리고 “과연 정화를 할 수 있을까”라는 대중의 반신반의로 좌절의 위기에 처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그때마다 동산스님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중심을 지키며 한국불교의 청정성 회복이라는 ‘교단의 화두’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

“오직 수행정진 올곧게 하는 것”

1차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부터

정화불사 완수 때까지

한 치 물러섬 없이 대중 이끌어

“정법으로 민족의 행복 도모하고

인류교화 위한 정화운동 공덕주”

1954년 11월5일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던 조계사에 비구승들이 진입하여 함께 머무는 일이 발생했을 때의 일화는 정화불사에 대한 동산스님의 확고한 신념을 엿볼 수 있다. 대처승 쪽에서 비구승이 머무는 방의 아궁이에 엄청난 양의 장작을 넣어 장판을 새카맣게 태웠다. 방을 뜨겁게 해서 비구승들이 머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나름대로 비책이었다.

용광로처럼 달구어진 방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대부분 대중이 밖으로 나갔지만, 동산스님만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방을 비우지 않았다.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청담스님은 “결사적인 투지로 그냥 앉아 배겨내는 것을 보고 대처 측에서도 ‘사명대사가 아니냐’며 경이(驚異)하던 일”이라고 당시 일을 회고한 바 있다. 단적인 사건이지만 정화불사의 원력 실현을 위한 동산스님의 확고한 의지를 가늠할 수 있다.

동산스님을 비롯한 당시 비구승들의 불교정화 원력은 해방 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조선을 침탈해 강제 점령한 일제가 불교까지 왜색(倭色)으로 변질시키고, 전통을 훼손시키는 일이 확산되면서 비롯됐다. 특히 일본 불교가 들어온 후 결혼하는 승려들이 부쩍 늘고, 이들이 조선불교의 실권을 대부분 장악하면서 청정승단 훼손에 대한 우려는 점점 커졌다.

조선불교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지만 누구하나 쉽게 나서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수좌들이었다. 조선불교의 왜색화가 점점 확대되고 영향력을 키워가는 시절이었던 1931년 3월14일 경성 선학원에서 ‘조선불교 선종 제1회 수좌대회’가 열린 것이다.

‘선풍(禪風) 진작과 납자(衲子) 결속’이란 명분으로 개최된 수좌대회는 불교의 정통성과 수행풍토 회복을 위한 수좌들의 원력이 발현된 것이다. 이때 범어사 조실로 있던 동산스님도 참석해 뜻을 같이했다.

  
청정승단 구현에 대한 동산대종사의 원력은 본격적인 정화불사 이전인 1941년 3월13일 경성 선학원에서 열린 고승법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35년 여름 동산스님은 설악산 봉정암에서 효봉, 청담스님과 함께 안거 정진을 한 이력이 있다. 당시 세분이 정진하는 과정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정확하게 전하는 바는 없다. 하지만 훗날 정화불사 추진 과정에서 동산스님을 비롯해 효봉, 청담스님은 흔들리지 않는 원력과 발심으로 대중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스님들이다.

세분의 스님은 조계종의 법통(法統)을 상징하는 종정에 추대돼 사부대중을 인도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1935년 여름 설악산 봉점암에서 세 스님의 안거는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고 ‘전기’임에 틀림없다.

청정승단 복원에 대한 동산스님의 원력은 은사 용성스님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1926년 5월 용성스님은 건백서(建白書)를 통해 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두 차례 나온 건백서에서 용성스님은 “불교 교단은 원래 출가자와 재가자로 구분되며, 비구와 비구니는 대처식육(帶妻食肉)을 엄금하고, 수행에 전념하도록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용성스님은 “조선 승려 중에는 아내를 거느리고 고기 먹는 자가 사원을 장악함으로써 수행 납자와 나이 많은 납승(衲僧)들이 자연적으로 쫓겨나서 눈물을 흘리며 방황하고 있다”면서 “유처(有妻) 승려와 무처(無妻) 승려를 구별하여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할 것”을 촉구했다.

용성스님의 건백서는 한국불교 정화불사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건백서 형식을 취했지만, 정법에서 어긋나고 있는 조선불교와 조선불자들을 향한 용성스님의 간절하고 절박한 토로였다.

1941년 3월13일 경성 선학원에서 열린 ‘고승법회(高僧法會)’는 한국불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법회였다. 유교법회(遺敎法會)라고도 불린 이날 법회에서 동산스님은 계율을 설명한 <범망경(梵網經)>을 강설하며 “취처승(娶妻僧)들이 왜곡하고 있는 진정한 대승계율(大乘戒律)이 무엇인가”를 질타했다. 이날 동산스님은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아 조사(祖師)의 종품(宗風)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설했다.

1945년 일제가 항복하고 광복을 맞으면서 한국불교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고,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한국불교 또한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종단 지도부는 사임하고,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해 사찰령과 31본말사법을 폐지했다. 이어 조선불교 교헌(敎憲)을 제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을, 각 도(道)에는 교무원을 설치했다.

또한 불교 혁신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념적으로 치우쳐, 대중의 지지를 온전하게 받지 못했다. 해방직후 전국에는 약 1만여 명의 출가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독신을 유지하고 있는 스님은 800여명에 불과했으며, 불교계 실권은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유교법회’로 더 잘 알려진 이날 기념사진. 앞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동산스님. 오른쪽 사진은 1950년대 후반 조계사에서 정화불사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동산스님.


대부분 참선 정진하는 수좌였던 비구승들은 갖은 냉대와 멸시 속에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고 인내했다. 수행에 전념하며 머물 수 있는 도량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스님들이 많았다. 특히 범어사와 선암사 선원에는 수좌들이 운집해 화두를 참구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제강점기에 뿌린 정화불사의 씨앗이 점점 움트기 시작했다. 1953년 4월 통도사에서 전국승려대표자대회와 고승회의(高僧會議)가 열려 불교 중흥 방안을 논의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전국 선원에 왜색불교를 규탄하는 내용의 격문(檄文)이 돌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가 해방이 된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아직도 왜색 사판승들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국의 비구승들은 더욱 더 단합하고 분발하여 1600년간 지켜온 우리 불교의 청정계맥을 바로 세우고 흐트러진 승풍(僧風)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 일로 동산스님은 잠시 범어사를 떠나야 했다고 한다. 당시 대처승들이 선원 문을 닫고 조실 동산스님을 추방하는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격문 사건’의 배후에 동산스님과 수좌들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수적 열세로 부득이 동산스님과 수좌들은 영천 은해사로 주석처를 옮겨야 했다.

당시 김법린 문교부장관과 전진한 의원(전 사회부 장관)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 범어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김법린 장관은 범어사와 인연이 깊고, 전진한 의원도 신심 깊은 불자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점차 사회 각 분야는 정상 궤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산스님을 비롯해 효봉, 적음, 금오, 청담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불교 정화의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정법의 깃발을 올렸다. 이때가 1954년 8월24일이었다. 이틀간 서울 선학원에서 열린 제1차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불교정화운동을 결의했다.

이어 9월30일에는 제1차 불교정화중앙종회를 개최하고, 11월3일에는 제2차 중앙종회를 열어, 종단 소임자를 선출했다. 이에 따라 종정(宗正)에는 동산스님, 도총섭(都摠攝, 지금의 총무원장에 해당)에는 청담스님이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동산스님이 종정으로 선출된 사실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화운동 초기에 종정으로 추대된 것은 당시 비구승들이 동산스님의 원력에 동의하고, 대중이 따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5년 전국비구승대회가 3차례나 이어지고,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유시도 수차례 나왔다. 하지만 수십 년 이어온 왜색불교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1955년 8월1일부터 사흘간 10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렸다. 이때 스님은 재차 종정으로 추대됐다. 이때 총무원장은 청담스님, 재무부장은 영암스님, 감찰원장은 금오스님, 감찰부원장은 서운스님이 맡았다.

그해 8월12일 비구스님들이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의한 내용을 국가에서 인정하면서 정화불사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완전하게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대처승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고, 사찰 인계를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청정 수행가풍을 세우기 위한 노력 역시 중단되지 않았다. 정법을 향한 전진은 계속됐다.

대의스님은 ‘한국불교 정화와 동산스님’이란 글(1965년)에서 “불교 진리의 정법으로써 국가 민족의 행복을 도모하고 전 인류를 교화시키기 위한 정화운동의 공덕주(功德主)이시며 최초의 종정(宗正)이신 동산스님의 높으신 뜻을 우리는 진심으로 찬양하며 후생(後生)에게 계승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산스님도 “동산 대화상은 한국불교 정화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영도하셨다”면서 1955년 8월12일 전국승려대회 소집 당시 일화를 회고한바 있다. 7월11일 금오, 청담, 탄허, 지효, 적음스님 등이 승려대회 소집여부를 놓고 회의를 이어갔다.

당시 정부와 대처승들의 반대가 극심해 대회 개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경산스님은 “(그때) 동산스님 단신(單身)만이 시퍼렇게 기상이 서서 강력히 대회 소집을 주장함으로 마침내 일동 만장일치로 찬성 가결하게 되어 전국승려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면서 “종권의 주권(主權)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한국불교의 청정 수행가풍을 되살리려고 했던 동산대종사의 가르침은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고 밝혔다.

동산스님의 정화운동은 청정승단 구현을 통해 수행을 중심에 놓고자 했던 것이다. “정화는 오직 수행정진을 올곧게 하는 것이다. 진짜 정화는 이것이다. 우리가 정화를 한 것은 이렇게 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정화불사는 동산스님이 종정을 맡는 등 전면에 나서면서 불길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

  
1950년대 후반 조계사에서 승려대회를 마치고 대열 앞에서 선 동산스님.



■ 동산대종사 어록

“일체사(一切事)는 불타정법(佛陀正法)에 따르기만 하면 옳게 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사부중(四部衆)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본연대도(本然大道)에 나서라.”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단순하고 피상적인 방법으로 복을 구하는 것은 너무 허망한 일이다. 불교는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자기가 지은 인과의 업보로 설명하니, 범부(凡夫)들이 불전(佛前)에 한두 번 불공이나 하고 시주나 조금 한다고 그 죄가 없어지고 대뜸 복을 받겠는가? 우리가 복을 구하더라도 복을 받을 행동을 해야 되는 법이니, 실질적으로 복을 받을 신앙생활과 수행을 쌓아야 되겠다.”

“자성(自性)은 진실하여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며, 법(法)은 곧 마음의 뜻이다. 자심(自心)이 보리(菩提)이며 자심이 열반(涅槃)이니 만일 마음 밖에 부처와 보리를 가히 얻을 수 있다고 하면 옳지 못한 것이니, 그렇다면 부처와 보리가 다 어느 곳에 있는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잘 써서 공부를 하여야 한다. 그래야 날로 진취가 있는 것이요, 마음을 잘 쓰지 않고 나쁘게 쓰면(惡用之心) 설령 공부가 조금 있다 하더라도 날로 퇴전(退轉)해 가고 진보(進步)되지 않는다. 그러니 항상 마음을 잘 가다듬고 공부를 해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비구는 삼보(三寶)의 일수(一數)이다. 대자비(大慈悲)로 신도를 섭수하고, 신도는 대신심(大信心)으로 봉행하라”


■ 동산대종사 ‘불교도의 역사적 사명’

1960년 1월1일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 창간호 1면에 실린 동산스님의 ‘불교도의 역사적 사명’이란 글의 일부이다. 정화불사에 나서야 하는 명분과 이유가 담겨있다.

“불교는 근본 세속 인연을 벗어나서 세간을 초월하는 해탈의 대도를 배우는 것이 종취(宗趣)가 되느니 만큼 대처식육(帶妻食肉)하고 생자양손(生子養孫)의 재가생활(在家生活)을 버젓이 하면서 나도 과거부터 ‘중’이라고 승단(僧團)과 종권을(宗權)을 장악하고 사원(寺院)을 그 영생(營生) 소굴화(巢窟化)하려는 야속(野俗)한 음모를 세속 법정에 까지 호소하여 비구승단을 전복시키려함은 참으로 사자신중충(獅子身中蟲)이 스스로 제 고기를 파먹는 자멸행위임을 신(神), 인(人)이 함께 통탄할 바이다.

불교는 동양적인 특수한 문화유산으로서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출가학불(出家學佛)’하는 자를 ‘승려’라 해왔고, 재가자는 ‘신남(信男)ㆍ신녀(信女)로서 분(分)을 따라 불법(佛法)을 신행(信行)하여 왔으니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인 특수한 제도와 문화적인 전통에 입각한 종단을 재건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과거시대부터 대처제(帶妻制)가 공인되었다 하더라도 시대의 정의와 만인(萬人)의 공론(公論)에 의하여 그 왜곡을 바로 잡아 놓고 재래(在來) 대처자(帶妻者)도 다시 출가하여 독신수행(獨身修行)할 분은 다 같이 한 승단에 포섭(包攝)될 것이오. 사정이 그렇지 못한 분은 재가교도(在家敎徒)로서 그 재능과 소습(所習)에 따라서 종단 각 기관에 적재적소로 봉사하여 다시 화합단결되기를 충심으로 바랄뿐이오, 그 밖에 아무런 원한이나 야심이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상대방이 이것을 이해치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바이다.

우리의 요구는 다만 종교적 특색과 역사적 전통에 입각하여 대의명분을 바로잡자는 것뿐이요. 권리나 재산을 쟁탈하기 위한 야비한 분쟁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방은 물론 만천하에 다시 선포하는 바이다.

‘대처승단(帶妻僧團)’ 이라는 명목에 그렇게 애착될 것이 없으니 ‘출가승단(出家僧團), 재가교도(敎徒)’로 개편하고, 같은 일불제자(一佛弟子)로 내외상응(內外相應)하고 화합 단결하여 ‘조국통일’과 ‘민도재건(民道再建)’의 역사적인 중대사명을 완수하도록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것만이 소위 지성적인 지도자에 선 우리 교도(敎徒)의 ‘양식(良識)’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대각성자(大覺聖者)’이신 ‘불타(佛陀)’의 후손이다. 너무나 무지몰각(無知沒覺)한 망동으로 사회대중의 조소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이제로부터 크게 반성하고 자중하여서 참으로 불교도다운 교도가 되어 역사적인 과업을 완수하기를 서로 서약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며 이 뜻을 우리 사부대중과 국민대중에게 통고하는 바이다. 조계종정(曹溪宗正 河東山).


[불교신문3100호/2015년4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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