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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 하안거 결제 법어-법보신문
이름 범어사 작성일 2018-06-11 / 조회수 97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 하안거 결제 법어

  • 주영미 기자
  • 승인 2018.06.04 15:37


“진리라는 이름에 사로잡히지 말라”


우리가 불문에 들어와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신 것일까 깊이깊이 생각해봅시다. 물론 부처님의 법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팔만대장경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선문(禪門)에도 보면, ‘불립문자(不立文字)’ 라고 글자 한 자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선문처럼 말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머리로 생각해 본 요점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똑같진 않겠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나 자신을 닦는다.’로 귀결됩니다. ‘나 자신을 닦는다.’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해보면, 나는 좌복에 앉아 있습니다.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모양으로 말하자면, 머리 꼭대기부터 밑으로는 발가락 끝까지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육신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식으로 바로 해야 되나요? 육신은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 코, 귀를 ‘나’라고 볼 수 있습니까? 눈과 코와 귀에게 물어봐도 답이 없습니다. 질문을 한 자신만 답답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눈을 통해서 바깥 물체를 보면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귀를 통해서 외부의 소리를 들으면 역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생각하고 있는 놈이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이 육신을 끌고 다니면서 눈으로 책을 보고, 귀로 많은 법문을 듣고, 머리로 생각도 많이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무엇입니까? 만약 잘못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많이 듣고 봄으로 잘못한 점이 하나하나 수정이 되고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많은 법문을 듣고, 책을 보고, 생각도 많이 했다면, 듣기 전, 보기 전, 생각하기 전에는 자신이 형편없었는데 그것이 한 해, 한 해 그리고 1년, 2년이 지나고 보니 ‘내가 이렇게 좋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좋아졌다면 잘못된 점이 없어졌다는 말 아닙니까?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전의 몸과 마음을 10년 후의 지금과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게 되어야 지금까지 노력하고 고생하며 수행한 보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앞서 불법의 골자가 ‘마음을 닦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을 깨닫는다.’라고도 표현합니다. 마음 하나 깨닫기 위해서 부처님의 경전을 읽어 보고, 또 말로만 되지 않기 때문에 사교입선(捨敎入禪), 교를 버리고 선문에 들어왔습니다. 선문에 들어온 나름대로의 수행방법을 지도받아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제, 그저께도 아니고, 1년, 2년도 아니고 5년, 10년이 지났다고 하면,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 노력을 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결국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으로 성불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고통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 하나 깨닫지 못해서 헤매고 있는 겁니다. 동서남북 옥신각신 항상 불안하지만 마음 하나 깨달음으로 그렇게 헐떡거리고 헤매던 것이 없어집니다. 앉으면 앉는 대로, 서 있으면 서 있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누우면 눕는 대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조금도 불안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생활 속에 있는데 한 쪽은 이래도 불안하고 저래도 불안하고, 한쪽은 행주좌와에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일까요? 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고, 염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주력도 하고, 갖가지 나름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이렇게 노력해도 그 마음을 찾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면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면 될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을 찾아갔다고 합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서 절을 하며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자기가 본대로, 자기가 아는 대로 솔직히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조금도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선문에 보면, 솔직히 일러준 글귀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은 굉장히 복잡해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밤잠을 자지 않고, 애쓰고 노력했는데도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 노력을 하였기에 깨달았는지 그 깨달음의 내용을 좀 일러 주십시오. 저에게도 있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부처님의 말씀에도 그렇고, 그 깨달은 선지식의 대답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에게도 있다. 깨달은 사람만이 마음을 소유하고 있고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서 찾을 필요가 없고,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라는 것은 물건이 아니며 모양도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눈만 뜨면 눈에 빛이 보이니까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귀에 소리가 들리면 종소리, 목탁소리가 들린다며 이러쿵저러쿵 생각하고, 주위의 환경에 부딪히게 되면 오늘 날씨가 어떻다, 바람이 분다 하는 등 마음이라는 것은 이러쿵저러쿵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면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갈등이 생겨 “괴롭다.”라고 합니다. 또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얻어야 벗어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세속 사람들은 더러 재물, 명예, 권력이 답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설사 재물, 권력, 명예를 얻더라도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또 불안하고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해소시켜야 할까요?


법문을 들어보면, ‘도(道)’를 깨닫게 되면 모든 것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입니까? 일단 ‘도’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입력합니다. 그리고 ‘불법(佛法)’을 깨달아야 된다고 했으니 ‘불법’도 머릿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또 ‘진리(眞理)’를 터득하면 된다, 그래서 ‘진리’를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도 알아야 하고 불법도 깨달아야 하고 진리도 터득해야 되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이름에 사로잡혀 있으면, 옛 조사 스님들께서는 “도, 진리, 불법, 이런 것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진리, 불법, 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냐고 물을 때, 선사들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셨습니다. “할 수 없이 이름을 붙인 것인데 굳이 알려고 한다면, 마음 밖에 도가 없고 마음 밖에 불법이 없고 마음 밖에 진리가 없다. 이런 말은 들어 보았는가? 그렇다면 마음이 곧 도이며 마음이 곧 불법이요 마음이 곧 진리라는 말 아니겠는가? 마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라. 어떤 것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가?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어떤 마음이 새로 오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마음이 멀리 도망간 것은 아니다. 똑같은 마음인데, 똑같이 보고 듣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과 어떤 차이인가? 마음 하나 깨달음으로 인해서 지금까지의 쓸데없는 생각, 어리석은 생각이 딱 끊어져 버린다. 행주좌와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불안한 모습이 없다. 깨닫지 못했다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어떻게 해야 깨칠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빌리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분석하는 사량분별(思量分別) 때문에 마음이 가려서 보지 못합니다. 그 생각을 털어버리면 마음이 본래 있는 곳에서 저절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 조사 스님들께서는, “사람들은 너무 아는 것도 많고 지식과 분별이 마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두드려 잡기 위해서는 한 가지 알고자 하는 그 욕심 하나, 그 의심 하나만 딱 살려놓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속의 사량분별을 두드려 잡기 위해서일뿐 굳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터득한 사람이 몇 몇이나 되는지 짚어봐야 합니다. 드뭅니다. 1000명 중의 한사람, 100명 중의 한사람입니다. 대부분 병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신경을 너무 써서 머리가 아프거나 상기가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게으름 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도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시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깨달으셨습니까?”


그 선사는 자신의 깨달음을 솔직히 일러줄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나도 자네처럼 고민을 거듭 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하다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고 기진맥진, 더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 없고, 물러서려고 해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깥에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그 때 나는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물론 당신들도 종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종소리를 듣고서도 왜 깨닫지 못할까요? 그것은 종소리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종소리가 울릴 때 소리를 통해서 소리 없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딱 때릴 때 누가 먼저 알아차립니까? 자신입니다. 종소리가 귀에 울리면 누가 먼저 알아차립니까? 자신입니다. 차를 마시면 입에 찻물이 들어올 때도 역시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도 선사들께서는, “나는 이렇게 알았다.”라고 답을 합니다.


가만히 듣던 이는 세상 누가 그것을 모르냐며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십니까?” 그렇다면 선사께서는 무엇을 알려고 왔느냐며 재차 말합니다. “차가우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이 네 자신이고 네 마음이지 이것 빼놓고 마음이 따로 있습니까?”


옛날 육조 스님께 의발을 빼앗겼다며 쫓아왔던 도명 선사가, 나중에는 의발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법을 구하고자 왔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한마디 일러주시고 자신도 법을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그때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 보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내용이지요? 도명 선사는 그때 홀연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깨달았는가?”하고 물었더니, “어떤 사람이, 차가 입에 들어오자 차가우면 찬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압니다. 그와 같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육조 스님께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이것을 깨달았고 이 문중에서도 이것을 깨달았다. 그대도 내 말을 듣고 이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것은 깨달은 사람만이 찬 줄 알고 더운 줄 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깨달아야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기 전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찾고자 했던 마음이 가장 가까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라고 해서 그 때 까지 멀리 쫓아다니고 있던 것을 딱 끊어버리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습니다. 깨달은 사람만이 이 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믿음이 성취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믿느냐.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더운 것이 오면 더운 줄 아는 것이 자신이고 내 마음이라고 딱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벌어지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일어날 때 일어나고, 앉을 때 앉고, 일할 때 일하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물 마실 때 물 마시면서 피곤하면 쉬었다가 일하며 일상생활과 더불어 하나가 됩니다. 왜?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불법은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 몸이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허리가 비틀어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세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육신을 바로 하기 위해서 모든 일손을 놓고 좌복 위에 조용히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때 가부좌는 몸의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가끔 불교TV나 불교방송을 보는데 우리나라 선방 스님들의 좌선하는 모습이 영상에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좌복은 정말 바르게 잘 펴져 있습니다만, 몇 명의 스님을 제외하고는 많은 스님들의 자세가 굽어있습니다.


육신의 중심은 바로 허리입니다. 허리가 나오면 안 되고 허리는 바르게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허리가 들어가면 척추가 바르게 됩니다. 앉아 있을 때 육신을 바르게 잡아야 합니다. 걸어갈 때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이더라도 허리의 모습은 똑같습니다. 누워있을 때에도 옛날부터 허리 밑으로 손이 들어가면 장수한다고 했습니다. 몸을 바르게 하는 자세가 바로 가부좌입니다.


몸을 바로잡았다면,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입니다. ‘입정(入定)’이라는 것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과 더불어, 여러 가지 생각을 다 떨쳐버리고 몸이 쉬듯이 마음도 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보이고 소리도 들립니다. 그 때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도 하지 말고, 다 털어버리고 조용히 눈을 뜨고 앉아보십시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일체 생각을 떨쳐버리면, 바깥의 종소리가 들립니까? 어떻게 해서 들립니까? 생각을 해서 들린 것입니까? 특별한 재주를 부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깨어있으면 누구든지 들립니다. 눈앞의 물체가 보입니까? 물체는 어째서 보입니까? 눈 뜨고 있기 때문에 보입니다.


못 듣고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들어 있거나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입니다. 혼침(昏沈)에도 빠지지 않고 다른 생각에도 빠지지 않을 때 눈앞에 물건이 오면 저절로 보이고 소리가 나면 저절로 들립니다. 이것이 내가 찾고 있던 자신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 빼놓고 어디에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것인 줄 모르다보니까 이것을 무시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다 보니 마음속에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서 물체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은 종소리가 나자마자 종소리를 듣고 ‘앗!’ 하고 압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솔직히 일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믿을지 안 믿을지 걱정스러워서 솔직히 일러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옛 조사 스님들과 똑같습니다. ‘임제록’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과 같아지고 싶은가? 그러면 내가 너희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고 있을 때, 이 설명을 듣고 있는 놈을 확인해라. 그놈이 석가모니부처님이고, 달마대사이니라. 너희들이 직접 확인해라. 너희들이 확인을 못하고 있으니 헤매고 있는 것이니라.”


모든 생각을 떨쳐 버리면 저절로 보입니다. 저절로 들립니다. 저절로 차가우면 찬 줄 압니다. 더우면 더운 줄 압니다. 이것이 내가 찾고자 하는 불심이요, 도이며, 부처님이고, 진리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이러쿵저러쿵 찾다보니 부처를 비방하는 과보로 생사윤회를 하며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한 결론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이 자리에서 부처와 똑같은, 조사 스님과 똑같은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믿느냐, 못 믿느냐 이 차이입니다. 믿는 사람은, 고심하고, 고심하고, 또 확인하고, 확인해서 결론이 “아! 맞습니다.” 이렇게 되면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앉든, 서든, 가든, 오든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구애(拘?)받을 것도 없습니다.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남의 눈치를 볼 것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습니다.


불법은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했습니다. 무위는 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위법의 반대는 유위법(有爲法)입니다. 유위라는 것은 애를 쓰는, 외도들이 하는 짓이라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종소리가 났을 때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서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눈앞에 있는 물체가 보일 때 내가 무엇인가 생각해야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들리고 저절로 맛을 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도, 깨달았다고 하는 새삼스러운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얻을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의 지혜이고 거기에 마음을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들리는 것은 얻은 것이 아닙니다. 본래 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을 얻었다고 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자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얻은 자도 없고 잃어버린 자도 없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수행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아까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허리를 쭉 펴서 앉아 있어라 그리고 마음이 혹시 비틀어지지 않았는지 테스트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앉아서 눈을 뜨면 눈앞이 보입니다. 이것이 안 보이는 사람은 자고 있거나,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보이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잠시 2~3분 보고 있다가도 금방 혼침에 빠집니다. 또 금방 딴 생각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침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스스로 경책을 해야 할 것이며, 자기도 모르게 딴 생각을 하고 있다면 채찍질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 없는 벽이 말 없는 법문입니다. 내가 문을 열어 놓으면 그 벽이 내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벽이 자기를 막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에 감사하다며 내 속에 있는 혼침과 산란을 깨끗이 청소해 줍니다. 아시겠습니까? 받아주지 않는다면 여전히 딴생각을 하고 있거나 혼침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혼침도 없고 산란도 없으면 그 때는 벽이 주인보고 ‘주인이시어, 이제 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됩니다.’ 그 때는 굳이 상대를 눈을 뜨고 볼 필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됩니다. 수행의 과정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일단 먼저, 마음부터 확인해야 될 것 아닙니까?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아는 것, 이것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 있습니까? 믿었다면 이것이 혼침과 산란에 뭍이지 않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간화선(看話禪)은 간화를 통해서 선을 깨닫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불심입니다. 일본 조동종의 젊은 승려들이 20~30명 모여서, 우리나라 같으면 용맹정진, 일본에서는 ‘섭심(攝心)’을 24시간, 식사와 화장실 이용 이외에는 오로지 정진에 몰입하는 일주일을 마치고 나서 어떤 젊은이가 노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비사량처(非思量處)를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비사량처는 도대체 어떤 상태입니까?”


비사량이라는 말, 많이 들으셨지요? 생각 아닌 곳을 생각하라, 선사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무심(無心)이니라.” 또, 다른 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무심이 어떤 상태입니까?” 선사가 답했습니다. “잊어버린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잊어버려라.” 우리가 무심이 되려고 하는 그런 것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의 요령입니다.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고, 일할 때 일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을 따지고 있느냐는 상태가 바로 무심이고 비사량처입니다.


벌써 시간이 제법 흘렀습니다. 여기에서 제 이야기는 접고, ‘임제록’의 한 구절을 읽고 내려가겠습니다.


“너희들은 육체라고 하는 똥주머니를 짊어지고 바깥으로 향해서 돌아다니며 부처도 구하고 법을 구하기도 하고 있는데, 현실에 지금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그놈을 너희들은 알고 있는가? 그 놈은 팔팔하게 살아서 대활약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실재는 없다. 손으로 긁어서 모으려고 해도 모아지지 않고 흩어버리고 싶어도 흩어지지 않는다. 구하려고 하면 도리어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자연히 눈앞에 꽉 차서 충만하고 영명한 소리는 귀에 가득히 들려온다. 만일 너희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면 한평생 노력하더라도 헛수고로 마칠 것이다. 너희들, 그 놈은 한 찰나 간에 연화장 세계에도 들어가고 비로자나설법도에도 들어가고 해탈국토에도 들고 신통국토에도 들고 청정국토에도 들고 법계에도 들고 예토에도 들고 정토에도 들고 범부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부처님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아귀도나 축생도에도 들어간다. 그렇지만 어디를 찾아봐도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다. 다만 그 빈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실제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쓰지 마라. 얻었다, 잃어버렸다, 옳다, 그르다, 그런 것은 몽땅 집어던져버려라.”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이 5월29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불기 2562년 금정총림 범어사 하안거 결제 법회’에서 설한 내용입니다.

 


[1442호 / 2018년 6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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